retrospect

평안하길 바랐던 2022년

슬프면서도 즐겁고 숙명적이면서도 희망적인

2022. 12. 9.

글과 사랑, 그리고 행복을 고민하던 해였다.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으려 했던 게 문제였을 테다. 우울함이 나를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누군갈 그리워하고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처연함에 스스로를 소진했다. 그럼에도 삶을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는 더 이상 혼자 버티기 힘든 때일 텐데, 난 연락처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길 바랐다. 왜 난 그토록 아끼는 내 사람들에게조차 선뜻 기대지 못했을까. 어리석었다.

아직도 어떤 게 좋고 싫은지 모르는 게 많지만, 조금은 느리더라도 올곧게 스스로에게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올 한 해 계획했던 것들, 그리고 실제로 발생했던 이벤트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자주 보지 않더라도 꾸준히 오래 보길 원하는 내 인간관계론은 충분히 나와 내 삶을 지탱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내 사람이 아닐지라도 올해 내게 시간을 선물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연을 거쳐간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내가 그때 못나 보였으면 미안해요. 그래도 전 당신이 항시 평안하길 바라요.

착각은 네가 하고 욕은 내가 먹는 순환고리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점점 붕괴된다. 서로를 헐뜯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극악무도한 인간의 추잡함에 그만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사람이 득실거렸고 그들이 보기엔 나 또한 그러하리라. 그럼에도 나는 조금 뻔뻔하게, 내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담담하고 유연하게 살아간다. 어느 정도 무시하고, 어느 정도 고집을 부리면서, 그렇게 자존을 지켜간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미국의 어느 외과의사가 그랬듯, 책은 잘 다듬어진 렌즈처럼 세계를 새로운 사막으로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문학은 인간의 의미를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하며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추어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반성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가장 풍부하게 제공했다. 그에 반해 비문학은 사건을 잘 정리해놓은 기록을 우리가 살아가는 역동적인 세계에서 다음에 일어날 사건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건에 부합되는 이론은 어떤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문학을 예술, 비문학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어떤 것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할지 자명해진다. 프랑스에서 추상화가로 활동한 한묵(韓默)은 과학과 예술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과학은 현실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은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랬다. 현실을 탐구하기 급급했던 예전의 나는 문학이 어떤 사유를 가져와줄지 알지 못했으나 지금의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위대한 문학 작품은 나름의 고유한 테크놀로지를 내게 안내하고 현실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일조했다.

예술은 내게 사랑과 행복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게 도왔다. 그래서 전시를 지독히 보러 다니기도 했고 삶 속에서 조금이라도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찾아 헤맸다. 감히 내가 가진 취미의 대부분이 앎에서 기인했다 단언한다. 난 삶이 예술의 가장 고귀하고 정제된 무언가라 믿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술이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 멋진 삶이고 건강한 삶이다. 이런 삶과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당장 어떤 재앙이 닥쳐 우리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고 그 어떤 멍에를 지고서 우리 삶의 정체성이 누군가의 손에 달렸을지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죽음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진 모르겠으나, 죽음은 내가 소망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고 헛된 소망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도록 강요한다. 그렇게 저무는 것이 삶이라면 행복이 슬픔의 공간을 채우도록 내버려두리라.


나는 있잖아. 네가, 형이, 그리고 누나가 평안했으면 좋겠어. 올해는 잘 보냈어? 잘한 것도 있을 테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 그래도 누구보다 잘 살았다는 걸 내가 꼭 알게. 그러니 너도, 형도, 그리고 누나도 나 힘들 때 조금만 도와주라. 별거 없어. 그냥 나 한번 만나주고, 술 한번 같이 마셔주라. 그저 그게 내겐 정말 큰 힘이 돼. 모두 사랑해. 내가 여태 몰랐어. 앞으로도 우리 잘 지내보자. 행복하자 우리. 삶이 이렇게 아슬아슬해도 참 아름다워.